망해(忘解) – 잊어버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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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준(兪漢雋) 1732~1811
신영산 옮김

내 누님에게 아들이 있는데, 김이홍이라 한다.
이홍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주 심하였으니, 어떤 물건을 대하게 되면 열에 아홉을 잊어버렸고, 일을 하게 되면 열에 열을 잊어버리곤 하였다.
아침에 한 일이라도 저녁이면 벌써 혼미해졌고, 어제 한 일이라도 오늘이면 기억하지 못하였다.

이홍은 내게 하소연하였다.
“제가 잊어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병인가 봅니다.
대개 잊는 것이 제게 작게는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크게는 벼슬에서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며, 말을 하더라도 혹 실수하게 하기도 하고, 행동을 하더라도 무언가를 빠뜨리곤 합니다. 이 모두가 잊어버리는 것이 빌미입니다.
마땅히 제가 잊는 병을 고쳐줄 사람이 있다면, 어찌 천금인들 아끼겠사옵니까? 저는 장차 천 리도 멀다 하지 않고 찾아갈 것이옵니다.”

이에 나는 타이르며 말하였다.
“너는 잊는 것이 능히 병이 되는 것과, 잊지 않는 것이 능히 도움을 주는 것만 볼 뿐이다. 하지만 너는 잊지않는 것이 장차 네게 걱정을 끼치고, 잊는 것이 장차 네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도다.
내 원하거니 너는 잊는 병을 고치지 않기를 바라노라. 오히려 잊는 병을 고치지 말고, 또 더 많은 것을 잊어서, 드디어 크게 잊는 지경에 이르기를 바라노라.
정녕 네가 천금을 들여 천하의 잊는 병을 치료하는 의원을 구하여 치료하고자 한다면, 나는 왼손으로는 네 팔꿈치를 잡아당기고 오른손으로는 네 팔뚝을 붙잡아서, 네가 의원을 구하지 못하게 하겠노라.”

그러자 이홍이 나를 보며 말하였다.
“어찌 그렇게 말씀하나이까?”

왜 그러한가? 그것은 잊어도 좋은 것을 잊지 못하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리라.
무릇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잊는 것이 병이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차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는 사람들은, 잊는 것이 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히 그 말이 과연 옳겠는가?

천하의 근심거리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겠느냐? 잊어도 좋을 것은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눈은 능히 아름다운 여인을 잊지 못하고, 귀는 능히 좋은 소리를 잊지 못하며, 입은 능히 맛있는 음식을 잊지 못하고, 크고도 화려한 집에서 사는 것을 잊지 못한다.

제 몸이 천하면서도 큰 세력을 얻으려는 생각을 잊지 못하고, 제 집이 가난하면서도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생각을 잊지 못한다. 고귀한데도 교만한 짓을 잊지 못하고, 부유한데도 인색한 짓을 잊지 못한다.
의롭지 않은 물건을 취하려는 마음을 잊지 못하고, 제 실상과 어긋나는 이름을 얻으려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는 자가 되면, 어버이에게는 효도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임금에게는 충성하는 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부모를 잃고서도 슬픔을 잊어버리고, 제사를 지내면서도 정성스러운 마음을 잊어버린다. 제물을 받으면서도 의로움을 잊어버리고, 나아가고 물러날 때도 예의를 잊는다.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제 분수를 잊는가 하면, 이해관계에 놓일 때도 지켜야 할 도리를 잊곤 한다.

먼 것을 보게 되면 가까운 것을 잊고, 새 것을 보고 나면 옛 것을 잊는다. 말이 입에서 나올 때 가려해야 하는 것을 잊고, 몸에서 행동이 나올 때 맞게 해야 하는 것을 잊는다.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을 잊기 때문에, 것으로 드러나는 행실을 잊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행실을 잊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을 더더욱 잊게 되는 것이다.

이렇기에 하늘이 잊지 않아 때때로 벌을 내리기도 하고, 남들이 잊지 않아 때때로 질시의 눈길을 보내기도 하며, 귀신이 잊지 않아 때때로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잊어도 좋을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능히 속마음과 실제 행동을 서로 바꿀 능력이 있다.
속마음과 실제 행동을 서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잊고자 하는 것을 가히 잊을 수 있고, 자신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가히 잊지 않는다.

이홍이 너는, 성품이 강직하고 마음이 맑으며, 뜻이 단정하고 행실이 방정하다. 그렇기에 잊어서는 안 될 일을, 이홍이 너는 잠을 자든 깨어있든 잊지 않는다.
잊어도 좋은 것이라면 나는 네가 잊기를 바랄 뿐이고, 네가 잊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너를 병들게 한다는 잘 잊어버리는 것이 깊어지게 되지 않을까를 염려한다. 또 나는, 네게 복을 가져다준다는 잘 잊어버리는 것이 풍성하게 되지 않을까를 염려한다.

이러하니 어찌 천금의 보물을 싸 들고 천 리 먼 곳을 찾아다니며 잊어버림을 치료할 필요가 굳이 있겠느냐?
이홍아! 차라리 잊어버려라!

『자저(自著)』

<원문과 풀이는 아래에서>
유한준의 한문산문 ‘망해(잊음을 논함)’ 원문과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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